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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속아 숫자를 잊는 심리, 확률 무시

by 사카77 2025. 9. 12.

로또에 열광하고 비행기 사고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우리는 종종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곤 합니다. 오늘은 이처럼 감정에 속아 냉정한 숫자를 잊는 우리의 심리인 '확률 무시'에 대해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감정에 속아 숫자를 잊는 심리, 확률 무시
감정에 속아 숫자를 잊는 심리, 확률 무시

 

보이지 않는 손, 감정이 확률을 지배하는 메커니즘

우리의 뇌가 확률을 무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이 제시한 '이중 과정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의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 따르면, 우리의 사고방식은 두 가지 시스템으로 나뉩니다.

시스템 1 (빠른 생각): 직관적이고, 감정적이며, 거의 노력을 들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합니다. 위험을 감지하거나, 단순한 계산을 하거나, 익숙한 상황에 반응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시스템 2 (느린 생각):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신중하게 작동합니다. 복잡한 문제를 풀거나, 여러 정보를 비교 분석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활성화됩니다.

 

'확률 무시'는 대부분 시스템 1이 시스템 2의 개입 없이 폭주할 때 발생합니다. 확률 계산과 같은 복잡하고 추상적인 정보 처리는 시스템 2의 역할이지만, 생생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정보가 들어오면 시스템 1이 그 판단을 가로채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 강력한 심리적 휴리스틱(어림짐작)이 작용합니다. 첫째는 '가용성 휴리스틱'입니다. 이는 어떤 사건이 얼마나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느냐에 따라 그 발생 빈도나 확률을 판단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비행기 사고는 한번 발생하면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추락하는 비행기의 이미지는 매우 충격적이고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따라서 실제 통계와 무관하게 비행기 사고를 '매우 자주 일어나는 위험한 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훨씬 더 흔한 사망 원인인 심장병이나 자동차 사고는 상대적으로 덜 극적이고 일상적이라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아 그 위험성을 과소평가하게 됩니다.

둘째는 '감정 휴리스틱'입니다. 이는 우리가 특정 대상이나 사건에 대해 느끼는 좋고 나쁨의 감정이 그에 대한 판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상입니다. '로또'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 벼락부자, 인생 역전, 행복한 미래와 같은 긍정적이고 짜릿한 감정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이러한 강렬한 긍정적 감정은 '당첨 확률이 814만 분의 1에 불과하다'는 냉정한 확률 정보를 압도하고, '혹시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비합리적인 기대를 부풀립니다. 반대로 '암',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단어는 두려움, 불안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며, 이는 실제 위험 수준과 상관없이 우리가 그것을 회피하고 반대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이처럼 시스템 1은 가용성과 감정이라는 두 가지 지름길을 통해 복잡한 확률의 세계를 단순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확천금의 꿈과 추락의 공포: 확률 무시의 대표적 사례들

우리의 삶 속에서 확률 무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그 영향력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 0에 가까운 확률에 인생을 거는 '로또 구매'

대한민국 로또 6/45의 1등 당첨 확률은 약 814만 5,060분의 1입니다. 이는 매주 5천 원씩 로또를 산다고 가정했을 때, 약 3,132년 동안 매주 빠짐없이 사야 한 번 당첨될까 말까 한 확률입니다. 길을 가다가 벼락에 맞을 확률(약 50만 분의 1)보다도 훨씬 낮고, 심지어 아무나 특정해서 그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확률보다도 희박합니다. 이성적으로 본다면 로또 구매는 명백한 '기대값이 마이너스인 투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주 로또를 삽니다. 왜일까요? 바로 '당첨되었을 때의 엄청난 보상'이 주는 강렬한 감정 때문입니다. 수십억 원의 당첨금으로 빚을 갚고, 멋진 집과 차를 사고,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떠나는 짜릿한 상상. 이 생생하고 긍정적인 감정의 이미지는 '814만 분의 1'이라는 차가운 숫자를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립니다. 사람들은 확률(probability)이 아닌 가능성(possibility)에 돈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0이 아니잖아?'라는 일말의 가능성이 주는 희망과 설렘이 확률적 비합리성을 압도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나.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을 두려워하는 '비행기 공포증'

통계적으로 비행기는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입니다. 개인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수백만 분의 1에 불과하며, 이는 매일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전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비행기를 타는 것에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느낍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가용성 휴리스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비행기 사고는 대규모 인명 피해를 동반하는 극적인 사건이라 미디어의 집중 조명을 받습니다. 우리는 산산조각 난 비행기 동체, 슬픔에 빠진 유가족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 반복적으로 접하며, 이 이미지는 뇌리에 깊이 각인됩니다. 또한,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는 '통제력 상실'의 감각은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반면, 자동차 사고는 너무나 빈번해서 뉴스 가치조차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우리는 실제 통계라는 '기저율'은 무시한 채,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생생한 이미지에 의존하여 비행기를 자동차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보험 가입'

보험은 확률 무시가 긍정적(?)으로 활용되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대부분의 보험 상품은 가입자가 내는 총 보험료가 보험사가 지급하는 총 보험금보다 많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즉, 순수하게 확률과 기대값만 따진다면 가입자는 손해를 보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꺼이 보험에 가입합니다.

보험 회사의 마케팅은 확률 무시를 정교하게 공략합니다. 그들은 '암 발병 확률 30%'와 같은 통계 수치를 제시함과 동시에, 암으로 고통받는 가족과 그로 인해 무너지는 가정 경제의 모습을 감성적으로 보여줍니다. '만약 당신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닥친다면?'이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강렬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부정적인 감정은 '나는 괜찮을 거야'라는 막연한 낙관론을 무너뜨리고, '혹시 모를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합니다. 결국 우리는 매달 일정 금액을 지불함으로써 '끔찍한 미래가 현실이 되었을 때의 재정적 파탄'이라는 더 큰 불안으로부터 '심리적 안정감'을 구매하는 셈입니다. 이는 비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불확실성을 관리하고 심리적 평온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효용을 갖는 결정이기도 합니다.

 

감정의 함정에서 벗어나 현명한 의사결정자로 거듭나기

그렇다면 우리는 확률을 무시하는 타고난 본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할까요? 다행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지 편향의 존재를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감정의 함정에서 벗어나 훨씬 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잠시 멈추고 '시스템 2'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거나, 특정 사안에 대해 강렬한 감정(흥분, 두려움, 분노 등)이 밀려온다면 일단 의사결정을 보류하고 한 걸음 물러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는 감정과 직관에 의존하는 시스템 1의 작동을 잠시 멈추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시스템 2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느끼지?", "이 결정이 정말 합리적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둘째, 감정적인 일화가 아닌 객관적인 통계를 찾아봐야 합니다.
주변 사람의 성공담이나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에 현혹되지 말고, 의식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와 통계를 찾아보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질병에 대한 공포가 생긴다면, 그 질병의 실제 발병률, 연령대별 위험도, 예방을 통한 위험 감소율 등의 구체적인 수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숫자는 감정처럼 우리를 흥분시키거나 위로해주지는 않지만,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셋째, 결과를 다른 관점에서 재구성해 보는 것입니다.
로또를 살 때 '1등에 당첨되면 무엇을 할까?'를 상상하는 대신, '이 5천 원으로 살 수 있는 다른 확실한 행복은 무엇일까?'(예: 따뜻한 커피 한 잔, 좋아하는 간식)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이는 '거의 확실하게 잃게 될 5천 원'의 기회비용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해줍니다. 보험을 고민할 때는 막연한 공포에 휩싸이기보다, '이 보험은 나의 불안감을 줄여주기 위해 매달 지불하는 구독료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처럼 관점을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문제의 본질을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확률 무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심리적 경향입니다. 우리는 숫자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차가운 이성보다 뜨거운 감정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능을 이해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의사결정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우리의 뇌가 감정적인 이야기에 더 끌리도록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되, 그것이 항상 최선의 선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감정의 목소리만큼이나 숫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노력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 작은 노력들이 모여 당신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끄는 현명한 결정들을 만들어낼 것입니다.